Nohmad89

프로 여행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언어와 문화도 같이 배워가는 깊이있는 여행을 추구하는 어느 아마추어 여행자의 이야기

호주/호주 여행지

사막 한가운데서 치는 선사시대의 파도 :: 웨이브록(wave rock) :: 서호주 여행

Nohmad89 2019. 4. 28. 08:39
반응형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했던 사막 로드트립. 

프리스쿨에 영어를 배우러 나간 지 3주 정도 되던 때, 매일 얼굴을 보던 친구들이 차를 렌트해서 멀리까지 한번 다녀와 보자는 제안을 했다. 항상 놀러 가는 서쪽 해안 지역 외에 서호주의 북쪽이나 동쪽은 기차로 가려고 해도 철길이 없는 지역도 많은 데다 배차 간격도 너무 길고 다시 돌아오려면 1박 이상은 각오해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마침 이런 좋은 기회가 왔기에 퍼스에서 동쪽으로 5시간 정도 떨어진 웨이브록을 가 보기로 했다.

 

렌트카 업체. 여행날 아침 비가 오니 왠지 불안했다.

호주에 와서 첫 로드트립. 로드트립이라는 단어 자체에 엄청난 힘이 있는 건지 수학여행 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난 잠을 설쳤다. 그런 기대를 한 번에 무너뜨리듯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 밖은 어두운 하늘이 비를 연신 뿌려대고 있었다. 서호주의 날씨는 꽤나 변덕스럽다. 상대적으로 맑은 날이 많긴 하지만 어떤 때는 하늘이 심술을 부리나 싶을 정도로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날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비가 오면 어차피 금방 그칠 테니까 하고 우산 따위 쓰지 않고 그냥 가던 길 그대로 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비가 오면 꼭 우산을 쓰거나 건물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던 나에게는 무척 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중간에 주변이 너무 예뻐서 잠시 멈췄다.

호주는 우리나라와 차선이 반대다. 항상 그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거리를 건너다가 움찔한 적이 정말 많다. 호주에 온 지 한 달도 안된 내가 운전대를 잡는 건 너무 위험도가 높기 때문에 호주와 같은 차선을 사용하는 일본 친구들이 고맙게도 전부 운전을 맡아주었다. 아침에 심술궂게 으르렁대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한 하늘을 내보여주었고 덕분에 나는 뒷좌석에서 마음 편히 창 밖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퍼스를 벗어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도 주위는 너무나 평온했다.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이 맞겠다. 도심권을 벗어나도 중간중간 휴게소도 보이고 작은 마을이나 사람들이 사는 집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런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생각이었다. 이게 바로 호주의 아웃백이구나. 바다에서만 보던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땅 위에서도 보였다.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지평선을 본 적이 없다. 상상하려고 해 봐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그림이 눈 앞에 펼쳐져 있으니 닭살이 돋았다.

유채꽃인줄 알았던 카놀라 꽃밭.

길을 달리던 중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냥 물결이 아니라 지평선 전체를 빽빽이 메꾸고 있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이 정도의 유채꽃물결은 본 적이 없었다. 너무 예쁜 광경에 다들 넋을 잃고 내려서 한번 보자고 난리를 피웠다. 가까운 곳에 차를 대고 꽃밭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갔다. 도로 앞에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 내에만 꽃이 가득한걸 보니 단순한 자연 꽃밭이 아니라 사유지 농장 같았다. 무슨 꽃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저 멀리 표지판이 보였다. 'C..a...n..o..la..? Canola!?'. 집에서도 카놀라유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꽃을 못 알아보다니! 기름 원료로만 이름을 들었었는데 이렇게 예쁜 꽃이라니! 날씨가 화창했다면 사진이 더 예뻤을 텐데 아쉽다.

 

속이 뻥 뚫리는 사진. 우측에 카놀라 꽃밭이 보인다.

여행사의 투어가 아닌 자유여행의 좋은 점이란. 우리가 원할 때는 아무 때나 쉬어갈 수 있다는 거. 운전을 하며 가다 예쁜 풍경이 나오면 우리는 망설임 없이 차를 세우고 경치를 감상했다. 5시간이나 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거리를 연속으로 내달릴 수는 없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여행의 근본적인 목적을 생각한 우리였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급히 서두르지 말고 이 순간순간을 전부 천천히 즐기자고.

 

먼저 여행을 제안해 준 고마운 친구들.

아침 일찍부터 운전을 해 온 덕에 12시 언저리쯤 웨이브록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인가 우리가 일찍 와서인가 왠지 모르겠지만 관광객들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이 북적북적한 것보다는 당연히 좋은 상황이지만.

 

주차장에 렌트카를 주차하고 잘 꾸며진 길을 걸어 나오면.
이렇게 생긴 웨이브록이 나타난다.

정말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너무 환상적이고 예쁜 곳이다. 웨이브록을 보자마자 우리는 모두 바로 탄성을 내질렀다. 분명 여긴 사막 한가운데인데 어디선가 커다란 파도가 몰아쳤고 그 파도가 어떤 마법에 의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이 어마어마한 자연의 미술품인 웨이브록은 5억 년 정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선사시대의 파도'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사진으로 보면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높이가 엄청나다.
아래에는 다같이 서핑을 하는 포즈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한 가득 있다.

어떻게 이런 모양의 바위가 만들어졌나 싶다. 세로로 떨어지는 무늬의 바위결이 정말 강한 파도를 떠오르게 한다. 아마 포토샵으로 색만 잘 바꾸면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 진짜 파도라고 믿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전부 서핑보드를 타는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조금 위로 올라가 더 역동적인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바위가 엄청 미끄러워서 높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제일 친했던 일본인 친구 유우와 함께.
사막이라곤 해도 날씨가 흐리니 추웠다. 반바지 입고 온걸 조금 후회했다.

아래에서 한참 동안 친구들과 웨이브록 서핑 사진을 찍고 경치를 보기 위해 위로 올라왔다. 웨이브록은 돌덩이 하나가 딸랑 있는 게 아니라 110m나 되는 거대한 지형의 일부 단면이기 때문에 암석의 끝부분으로 향하면 천천히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동네 뒷동산을 탐험하는 기분으로 여유롭게 걸어와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은 쌀쌀한 사막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경치를 감상했다. 지금까지 달려왔던 사막의 길을 위에서 보니 참으로 색다르고 놀라웠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보니 마음이 뻥 뚫린 듯 시원해졌다.

 

이쯤 되니 이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이 놀라운 암석 덩어리를 발견하게 되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차도 없이 이 고립된 사막에서 우연히 웨이브록을 발견하고, 이 발견을 보고하기 위해 다시 돌아가고, 또다시 어떻게 찾아왔을지. 먼 옛날 이 지역을 탐험한 용기 있는 이름 모를 탐험가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이런 설렘과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웨이브록의 상단에는 안전을 위해 펜스를 쳐놓았다.

분명 관광객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해 놓은 펜스긴 하지만 뭔가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베를린 장벽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인간을 위해 훼손시킨 것 같아서 살짝 아쉬웠다. 듣기로 호주는 다른 가치보다 자연을 더욱 중요시 여겨 보호하고 관리한다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길래 웨이브록이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점프샷을 찍기 위해서는 희생도 해야지.
친구의 희생 덕에 좋은 점프샷도 건졌다.
일부러 이런 컨셉을 잡은건 아니지만 뭔가 미국드라마 포스터처럼 나왔다.

왕복으로 거의 10시간이나 걸리는 엄청 긴 여정이었지만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웨이브록을 보러 올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교통도 정말 열악하고 렌트를 쉽게 할 수 없는 사람도 많으니 가능하면 퍼스 시티에서 당일 투어를 이용하여 오는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만일 혼자 왔더라면 왔다 갔다 하는 길이 많이 외로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친구들이랑 같이 손짓 발짓하며 같이 영어 연습을 하며 웃고 떠드는 사이에 10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아마 호주의 여러 지역을 다녀봤어도 맨 처음의 로드트립인 웨이브록 여행은 가장 설레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