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hmad89

프로 여행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언어와 문화도 같이 배워가는 깊이있는 여행을 추구하는 어느 아마추어 여행자의 이야기

호주/호주 여행지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촬영지인 멜버른 그래피티 거리 :: 호시어 레인(Hosier Lane)

Nohmad89 2019. 5. 18. 08:03
반응형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호시어 레인

길거리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자기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며 낙서를 하는 것을 그래티피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왠지 모르겠지만 그래피티가 예술보다는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호주의 멜버른에서는 그래피티 활동이 하나의 예술 분야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멜버른의 뒷골목 곳곳에는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는 거리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빅토리아 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그래피티를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준 곳은 단 한 곳. 호시어 레인이라고 하는 골목뿐이다.

 

사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호시어 레인은 그냥 그래피티 거리일 뿐이지만 이 거리는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멜버른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가봐야 할 필수코스가 돼버린 것이다. 이유는 2004년 큰 인기였던 드라마의 촬영지이기 때문. 소지섭과 임수정이 같이 있던 이 거리는 그래피티만이 가득한 한적한 뒷골목에서 호주 멜버른에 왔다는 걸 증명하는 인증샷의 명소로 탈바꿈되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소지섭 뒤의 쓰레기통도 왠지 느낌있다.

사실 난 멜버른에 왔을 때 이 곳을 가봐야겠다고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만일 한국에서 바로 멜버른을 향해 왔던 여정이라면 미리 이곳저곳 어디를 갈지 다 생각하고 정해놨겠지. 하지만 난 당시 호주 일주를 하고 있었고 애들레이드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멜버른으로 달려왔기에 한국 사람들에게 유명한 여행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오직 손에 쥐고 의지했던 건 빅토리아 주 정부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받은 멜버른 여행 지도 하나뿐. 그랬기에 부끄럽지만 나는 호시어 레인에 알고 찾아간 게 아니라 나중에서야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다가 여기가 그 미사거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호시어 레인.

나는 여행을 가서 걸어다닐 때 첫날은 큰 길가 위주로 다니지만 둘째 날부터는 골목길을 통해 다니는 버릇이 있다. 당연히 첫날이야 그 나라에 왔으니 그 나라의 많은 것을 눈에 담아야 한다. 어떤 광고들이 주로 나오나,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은 어디인가, 도시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등이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현지인들이 다니는 좁은 골목길이나 숨어있는 로컬 식당을 다니며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다듬어진 모습이 아닌 그 나라의 본연의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긴다. 

 

멜버른의 여정을 시작하는 아침. 근처 노천 카페에서 여유롭게 따뜻한 롱블랙과 샌드위치를 먹고 지도를 켰다. 페더레이션 광장으로 가는 길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지도에서는 큰길을 따라 ㄴ자로 걸어 나가면 광장이 나온다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대략적인 광장의 위치만 파악한 후 골목길을 통해 대각선 방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길을 잃어버리면 좀 어때, 어차피 그것도 여행의 일부인걸.

 

잘 정돈된 멜버른의 골목길을 여유롭게 걸었다. 대도시의 느낌과는 다르게 아침부터 갓 구어진 빵 냄새를 풍기는 베이커리 카페와 햇살을 받기 위해 길가로 나와 기지개를 켜고 있는 꽃 화분들이 서울과는 다른 여유를 느끼게 한다. 그렇게 아름답게 가꾸어진 골목길을 지나다니다 다음 골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골목. 처음 보자마자 이 길로 가도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골목 전체를 뒤덮고 있는 그래피티. 아무래도 미드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이런 골목은 왠지 갱스터나 약쟁이들이 누워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그 골목을 지나는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일 이 곳이 미사거리라는 걸 진즉 알았다면 아무런 의심 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오히려 헤매지 않고 쉽게 찾았다고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겠지. 하지만 구글 지도에서도 이곳은 관광지라고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그냥 일반 골목길이었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이런 거리도 한번 보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호주에서 이미 1년 넘게 지냈는데 대놓고 길거리에 누워있는 약쟁이는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만약 누가 시비 걸면 바로 도망가야지'라는 생각으로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카메라를 꺼냈다.

 

꽤 짧지 않은 골목길에 그래피티가 한가득 그려져 있다. 마치 거대한 야외 미술관에 온 느낌이다. 마치 미국 대도시 어느 곳에서 볼 것만 같은 알록달록한 뒷골목의 광경이 눈앞에 한가득 펼쳐진다. 처음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스머프 같은 귀여운 캐릭터도 그려져 있다. 누워있는 약쟁이도 없다. 내 상상보다 훨씬 깔끔한 환경에 마음을 놓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는 시간에 딱 맞은 건지 아니면 먼저 들어가는 나를 보고 따라 들어온 건지 골목에 통행자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만일 다른곳에서 봤을 땐 그냥 더러운 쓰레기통이겠지만 호시어 레인에서는 이 쓰레기통도 예술 작품의 도구가 된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아마 쓰레기통을 배경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 호시어 레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통 앞에서 사진을 찍기를 원한다. 이런 것도 여행자가 느끼는 문화의 상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군데 군데 스프레이를 칠한 후에 공중으로 던져놓은 신발들이 보인다. 다른 곳에서 봤으면 당연히 쓰레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예술작품이 된 쓰레기통을 본 후라 그런지 이 신발들도 예술을 위해 이렇게 해놨겠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가 처음 온 시간이 꽤 이른 시간이었보다.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이 조금씩 골목으로 내려오면서 사진을 찍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부분이 동양사람. 아마도 한국인들이 아닐까 싶다. 

 

이 곳의 그래피티는 항상 같은 모양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매번 아티스트들이 새로운 페인팅을 덧칠해서 올 때마다 그림이 달라지는 곳이다. 그렇게 항상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어 훨씬 더 매력적인 호시어 레인. 모든 작품을 다 감상한다고 해도 10~20분 정도의 시간만 소요되는 작은 골목길이기에 멜버른에 온다면 부담 없이 와서 즐기고 가도 좋다.

 

반응형